경기도 DMZ 접경 지역을 따라 이어지는 평화누리길은 김포·고양·파주·연천 4개 시군을 잇는 최북단 도보 여행길이다. 철책선 너머로 분단의 현실을 마주하며 걷는 이 길은 동시에 수려한 자연경관과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다. 2010년 개장한 평화누리길은 총 12개 코스, 약 189km에 달하며 김포 3코스, 고양 2코스, 파주 4코스, 연천 3코스로 구성돼 있다.
DMZ와 맞닿아 있는 만큼 평화누리길에는 사계절의 색이 또렷하게 스며 있다. 경기도는 ‘계절별 색깔을 음미하며 걷는다’는 의미를 담아 ‘DMZ 사색(四色)하다’를 주제로 월별 추천 코스를 소개하고 있다. 설 연휴를 앞둔 2월, 겨울의 끝자락에서 만날 수 있는 길로 연천에 자리한 평화누리길 12코스가 꼽힌다.
연천군에 위치한 평화누리길 12코스의 이름은 ‘통일이음길’이다. 이 길은 한때 대한민국의 허리를 관통하며 북으로 이어지던 경원선을 따라 걷는다. 신탄리역과 대광리역, 신망리역. 지금은 기차 대신 사람의 발걸음만 오가는 세 개의 역은 분단의 시간과 일상의 풍경을 함께 품고 있다. 멈춰 선 철길 위를 걷는 경험은 단순한 산책을 넘어, 역사 위를 천천히 되짚는 여정에 가깝다.
통일이음길의 인상적인 출발점은 강원도 철원과 맞닿은 끝자락, 오래된 폐터널 속에서 만나는 ‘역고드름’이다. 경원선 철길 아래 남아 있는 이 터널 안에서는 고드름이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른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수백 개의 고드름이 얼음 숲처럼 펼쳐진다.
이 독특한 풍경은 2005년 마을 주민의 제보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전쟁으로 생긴 터널 상판의 균열 사이로 스며든 물이 얼어붙으며 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떨어진 물이 바닥의 얼음 위에 반복적으로 맺히며 자라거나, 얼음 표면의 미세한 물분자가 지하의 물을 끌어올리는 현상이 역고드름을 만든다.
위아래로 자란 고드름이 맞물린 터널 내부는 마치 거대한 이빨을 드러낸 동굴처럼 보인다.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짧은 기간에만 만날 수 있는 이 풍경은, 거꾸로 흐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역동성을 상징하는 장면처럼 다가온다.
평화누리길 12코스는 역고드름처럼 ‘거슬러’ 걷는 길이다. 자연과 시간,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 이 코스의 가장 큰 매력이다. 길은 고대산 자락을 스치듯 지나가며 고대산 자연휴양림의 겨울 풍경을 품는다. 눈 덮인 숲길과 차분한 공기는 걷는 이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춘다.
신탄리역에서 대광리역, 다시 신망리역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현재 열차 운행이 멈춰 있다. 동두천~연천 전철화 사업으로 전철 1호선이 연천역까지 연장되면서 기존 철길은 조용해졌고, 대신 차탄천 천변길이 걷는 이의 동반자가 된다. 차탄천이라는 이름에는 ‘수레여울’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초, 이방원이 이양소를 만나러 가던 길에 수레가 빠졌다는 설화도 함께 흐른다.
길은 옥계리로 이어진다. 이곳은 한때 38선 이북, 북한의 땅이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제4사단이 전진 배치됐고, 이후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이 번갈아 오가며 전선이 수없이 바뀌었다. 지금은 고요한 마을이지만, 땅속에는 치열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종착 지점에 가까워지면 평화누리길 어울림센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종주자들의 쉼터이자 인증 사진 명소인 이곳에서는 평화누리길 12개 코스의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인근 연천 로하스파크를 지나 옥녀봉에서 노선을 잠시 벗어나면, 고개를 15도 숙인 ‘그리팅맨’ 조각상이 길손을 맞는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상징하는 이 조형물 곁에서 바라보는 해발 205m 옥녀봉 정상의 연천 전경은, 걷는 동안 쌓인 생각을 말끔히 씻어준다.
통일이음길은 빠르게 소비되는 여행지가 아니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이 쌓이는 길이다.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방향을 다시 묻게 만든다. 멈춘 철길 위에서 이어지는 발걸음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다.
걷다 보면 ‘통일’이라는 단어를 굳이 크게 말하지 않아도 그 의미가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부풀어 오른다. 세 개의 역이 이어지지만 기차 소리는 들리지 않고, 대신 바람 소리와 발밑 자갈 소리, 차탄천 물소리가 길을 채운다. 이 고요함은 오히려 많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잇고 싶었는지, 무엇을 멈춰 세웠는지. 통일이음길은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기는 길이어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연천의 겨울이 끝나갈 무렵, 멀리 떠나지 않고도 ‘걷는 여행’다운 여행을 원한다면 평화누리길 12코스는 충분히 좋은 선택이다. 특히 역고드름이 남아 있는 2월이라면 ‘거꾸로’라는 풍경 하나만으로도 이 길을 걸을 이유는 충분하다.
한 걸음씩 걸으며 마음까지 정리되는 길, 걷고 나면 자연스레 누군가에게 “한번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지는 길. 통일이음길은 오늘도 그렇게, 우리 일상 속에서 조용히 ‘잇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더경기뉴스=최용락 기자)